탐보라(Tambora)산은 인도네시아 순바와(Sumbawa) 섬에 있는 화산으로, 1815년 화산 폭발은 인류 역사상 가장 강력한 화산 폭발 중 하나였다. 화산폭발지수인 VEI(Volcanic Explosivity Index) 7 규모의 분출로 160~213 세제곱 킬로미터의 물질을 대기로 방출해 역사상 가장 최근에 확인된 VEI-7 분출이다.
※ 옐로우의 세계사 연표: http://yellow.kr/yhistory.jsp?center=1815
당시 네덜란드 동인도 제도의 일부였던 탐보라 화산 폭발과 관련하여 직접 피해로 사망한 주민만 7만여 명에 달하며 화산 폭발로 산 상부 1450m가 날아가 탐보라 산의 높이가 4300m에서 2850m로 낮아졌다. 화산 전문가들은 탐보라 화산 폭발의 위력을 히로시마에 투하한 원자폭탄 17만 개가 동시에 폭발한 것과 맞먹는다고 추정했다.
탐보라산은 인도네시아 군도의 순다 화산호를 따라 형성된 두꺼운 화산 지대에 속해 있다. 순다 화산호는 동서로 길게 뻗어 있는데, 이는 훨씬 거대한 불의 고리(Ring of Fire, 환태평양 조산대)의 일부이다.
탐보라산은 1812년부터 화산 활동의 조짐이 보여 1815년 4월 5일 분화를 시작으로 1815년 4월 10일 격렬한 분화의 절정에 이르렀다. 열대지역 화산에서 폭발로 번진 재는 전체 위도 상공으로 확산되면서 지구기상시스템이 점차 마비됐다. 사상 최대 규모의 폭발이었지만 당시 지리학계에도 보고되지 않고 나폴레옹 전쟁 등 격변의 시대사에 묻혀 세간의 관심으로 방치됐던 사건이다. 세계사 책에 서술되는 대신 날씨 이야기로, 그것도 멀리 떨어진 다른 나라에서 다른 언어로 남겨졌다. 여름을 잃은 해(Year Without a summer)라는 바로 그 얘기다.
1816년, 근처의 온도가 낮다.(https://www.nature.com/articles/s41598-017-07969-0/figures/1)
화산이 폭발할 때 공기 중에서 막대한 양의 입자와 가스가 방출된다. 대형 화산의 분출은 이산화황 가스를 상층 대기(성층권)에 주입하여 그것이 물과 반응하여 황산운을 형성함으로써 기후에 영향을 준다. 이 구름은 태양광선을 차단하고 우주로 돌아가게 하기 때문에 에너지가 지표에 도달하지 못해 하층 대기와 지표가 냉각된다.
1815년 인도네시아 탐보라 화산 폭발의 경우 이산화황이 연직 44km까지 도달하여 성층권으로 확산되었으며, 이로 인해 1815년 전 세계 연평균 온도가 5℃ 하강하여 여름(6월) 북미 지역에 50cm, 폭설 등 이상 기후가 발생하였고, 1816년에는 평균 지구 온도를 0.4-0.7°C(0.7-1°F) 낮추는 심각한 기후 이상으로 여름이 없는 해로 알려져 있다. 1816년 유럽의 여름 기온은 1766년부터 2000년 사이 기록상 가장 추웠다. 이로 인해 북반구 전역에서 농업 실패로 심각한 식량 부족이 발생하였다. 역사학자 John D. Post는 이를 “서구 세계의 마지막 생존 위기(The Last Great Subsistence Crisis in the Western World)”라고 불렀다. 1816년의 기후 이상은 대부분의 뉴잉글랜드, 대서양 캐나다와 서유럽 일부 지역에 가장 큰 영향을 미쳤다.
담보라가 전 세계적인 기후 패턴에 과격한 영향을 미친 것은 부분적으로는 탐보라 폭발 당시 이미 불안정한 기후 조건 탓도 없지 않았다. 1808년 남태평양(?) 열대 지방의 큰 화산이 폭발한 적이 있다. 이 폭발로 시작된 기온 저하가 1815년 담보라의 거대한 폭발로 극대화되었고, 이로써 1810년대 내내 극단적인 화산 기후가 확정되고 말았다.※ ※ https://en.wikipedia.org/wiki/1808_mystery_eruption
여러 세계사적 사건에 크게 들어간 작게 들어간 탐보라 화산 폭발 사건과 관련된 1810년대의 극단적인 기후가 영향을 미쳤다. 게렌 다시 우드(Gillen Wood)는 <세계사를 바꾼 화산 탐보라의>로 19세기 초 아일랜드를 강타해 많은 사람을 죽게 한 대기근과 전염병, 1830년대 세계를 대혼란에 빠뜨린 콜레라의 발생, 중국 윈난성이 20세기 초 세계 마약의 80%를 공급한 중국의 핵심 아편 산지로 떠오른 이유, 영국 근대문학의 대표작 <프랑켄슈타인>의 탄생, 공중보건과 복지국가 이념의 탄생 등 이 책은 전 지구를 강타한 하나의 사건으로 설명하고 있다.또 나폴레옹의 워털루 전투 패배도 탐보라가 몰고 온 폭우가 영향을 미쳤다는 주장도 있다.(https://www.imperial.ac.uk/news/187828/napoleons-defeat-waterloo-caused-part-indonesian/)
조선에서는 순조 16년(1816년) 흉년의 기록을 볼 수 있다. 순조 14년(1814년) 호구조사는 790만 명이었으나 순조 16년에는 659만 명으로 급감하였다. 130만 명이 줄어든 것이다. 이 모든 것이 아사했을 리는 없으나 흉년과 기근으로 화전민이나 도적이 되는 등 호구조사에서 이탈한 듯하다. 징수할 조세도 쌀은 25,000석이 부족했고 무명도 300동이 부족했다. 세입은 부족했지만 경상도에 8,000석의 구호미를 긴급 방출하는 등의 이유로 세출은 오히려 늘어 조선 후기 재정 붕괴를 가속화했다.
화산폭발지수(VEI) 7의 역사상 사례는 1815년 인도네시아 탐보라 화산, 1465년 미확인(상강?/1452~1453?), 1257년 인도네시아 사마라스(Samalas) 화산, 946년 백두산, 120~150년경 뉴질랜드 타우포 화산, 기원전 1610년경 에게해 미노스(테라) 화산 분화가 있다.※ 화산폭발지수(VEI) 6이상조회 : http://yellow.kr/vei.jsp 세계사를 바꾼 화산 탐보라 – 길론다시우드 / 류현식 역 / 소와단 / 2017.04.25
탐보라에 의한 기후변화는 가혹했던 나폴레옹 전쟁(1803~1815) 직후에 일어난 일이었기 때문에 언제나 시대적 분쟁이라는 그늘에 방치되어 있었다. 눈으로 볼 수도 없고 아무도 몰랐지만 사실 탐보라는 19세기 초 세계를 강타한 화산의 스텔스 폭격이었다. 캘커타(Calcutta)에서는 메스꺼운 콜레라를 일으켰고, 중국 윈난과 영국의 티론(Tyrone)에서는 농부 아이들이 굶주림에 시달렸다. 희망을 찾는 탐험가들은 북극해 북서항로를 따라갔고 미국 볼티모어의 부동산 투자자들은 파산에 이르렀다. 전 세계인은 불시계획에 화산이 이끄는 대로 운명의 길을 걸었다…… 탐보라 화산 폭발 이후 3년간 세계 거의 모든 지역에서 살고 있다는 것은 그야말로 배고픔을 의미했다. 뉴잉글랜드에서는 1816년을 여름을 잃은 해 혹은 1800년대에 얼어 죽을 뻔했던 해라는 별명으로 불렀다. 독일에서는 1817년을 거지의 해로 정했다. 전 세계적으로 가뭄과 서리 때문에 수확이 엉망이 되고 홍수가 농작물을 휩쓸고 말았다. 미국 버몬트 주에서는 고슴도치를 잡아먹고 쐐기풀을 삶아 먹고 중국 윈난 성에서는 흙을 핥아 먹었다. 여름에 프랑스를 여행하던 한 여행자는 거지 떼가 모여 있는 모습을 보고 군대가 행군하는 줄 착각하기도 했다… 나폴레옹 전쟁이 휘몰아친 유럽 대륙에서 수만 명의 제대 군인은 가족을 부양할 능력이 없었다. 그들의 절망은 광장에서 폭동을 일으켰고, 군사 작전을 방불케 하는 방화로 이어졌다. 유럽 정부들은 어느 나라든 혁명을 두려워했다. 비극은 누군가에게 축복이다. 지긋지긋한 기근은 1818년 풍작 후에 끝났다. 그 3년간 러시아와 미국 서부의 농민들은 전례 없는 큰 돈을 벌었다. 그들은 대서양 무역에서 절망적인 구매자에게 곡물을 천정부지로 팔았다. 이들을 제외하고 지구상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그때가 ‘최악의 시간’이었다…… 탐보라가 전 세계적 기후 패턴에 과격한 영향을 미친 것은 부분적으로 탐보라 폭발 당시 이미 불안정했던 기후 조건 탓도 없지 않았다. 6년 전인 1809년 열대지방의 주요 화산이 폭발한 적이 있다. 이 폭발로 인한 기온 저하가 1815년 탐보라의 거대한 폭발로 더욱 극대화되었고, 이로 인해 1810년대 내내 극단적인 화산 기후가 확정되고 말았다.… 1817년 벵골 지역에서 풍토병이 유례없이 만연한 이유는 새로운 변종 콜레라가 생겼기 때문으로 추정된다. 이 변종에 대해서는 원주민의 기존 면역체계가 도움이 되지 않았다. 신종 콜레라는 일단 벵골 지역에서 만연한 뒤 사방으로 퍼졌다.사람에서 사람으로 전염되면서 점점 강화되던 콜레라균은 어느 순간 전염성이 극도로 강화된 초강력 전염병이 됐다. 따라서 기본적인 전염 통로는 자주 왕래하는 사람들이었다. 군인, 순례자, 이동해야 할 상인 등이 콜레라에 감염된 채 인도 전역에 흩어져 항체가 전혀 없는 공동체에 들어간 게 1817년이었다. 이후 10년간 이들은 인도뿐 아니라 글로벌 무역망에도 들어갔다. 남동쪽으로는 네덜란드령 동인도와 동아시아, 또 북서쪽으로는 무역로를 따라 아라비아를 거쳐 러시아와 유럽, 마침내 아메리카 대륙까지 콜레라가 전파되었다. 결국 19세기에 콜레라에 의한 사망자 수는 전 세계에서 수천만 명을 헤아리게 되었다…… 콜레라가 기본적으로 미스터리였고, 19세기 수준에서는 치료를 시도할 정도로 병을 키울 뿐이었다. 불안에 휩싸인 사람들은 수많은 가설, 수많은 명령, 수많은 권위 있는 이론을 들을 수 있었다. 그러다 보니 콜레라는 역사상 가장 많은 사례보고가 이뤄진 병이 됐고, 전문의학적인 글과 일반인을 대상으로 한 글이 무수히 쏟아졌다. 연구 규모나 대중적 관심사로 보면 20세기에 그에 버금가는 질병은 에이즈(AIDS)뿐이었다. 콜레라와 에이즈는 문화적으로 비슷한 양상을 보였지만 콜레라는 근대적 공중보건체계에서 접근한 최초의 질병으로 유럽 전역에서 새로운 보건행정체계가 구축되는 계기가 됐다. 역사학자 크리스토퍼 햄린이 말했듯이 콜레라는 19세기의 양심을 움직였다.” 왜냐하면 당시 유럽에서 새롭게 발달한 도시빈민층에 처음 주목한 계기가 되었고 오늘날과 같은 전문화된 공중보건 개념이 그때 처음 나타났기 때문이다… 따라서 탐보라 기후변화가 만들어낸 괴물전염병 콜레라가 19세기 역사에 끼친 영향은 아무리 강조해도 과언이 아니다. 콜레라는 그 자체가 인류의 진보에 대한 모욕이었다. 콜레라는 당시 유럽과 북아메리카 지역을 주도하던 부르주아에 대한 신뢰를 깼다. 새로운 세계 시장의 약점이 질병에 노출됐기 때문이기도 하고, 동시에 콜레라가 만연한 슬램 지역에서 경제적 불평등이 노골적으로 나타났기 때문이기도 하다. 1831~1832년, 1848년, 1871년 등 주요 혁명이 빈번하게 일어난 시기를 보면 콜레라와 계급투쟁의 연관성을 짐작할 수 있다. 1800년대 중반부터 탐보라가 주도한 콜레라는 14세기 흑사병에 버금가는 재앙을 가져왔다. 흑사병 당시에도 민중봉기와 반란이 잦았다. 콜레라는 빅토리아 시대의 최악의 악몽이었다. 콜레라의 증상이 나타나기 시작하자 상상할 수 있는 가장 굴욕적인 방법으로 배설 기관이 작동하여 주로 가난한 사람들과 억압받는 사람들을 희생시키기 때문에 근대 사회가 번영에도 불구하고 얼마나 자비롭지 않은지를 극명하게 보여주었다. 노예제도 폐지 논란으로 인종 문제가 정치적 화두로 떠올랐다. 그래서 노예뿐만 아니라 보건문제가 19세기의 가장 주요한 사회정의 문제로 간주되었던 것이다… 예를 들면 중국의 하이난도(해남도, 하이난도)는 위도상 열대지방에 속하지만, 그래도 1815년 여름에 눈이 내리고 겨울에는 강추위로 숲속의 식물의 절반이 죽고 말았다. 중국 동부 지역에서는 탐보라 시기에 지속적인 저온으로 흉년이 들어 고통을 받았다. 산서지역에
1816년, 근처의 온도가 낮다.(https://www.nature.com/articles/s41598-017-07969-0/figures/1)
화산이 폭발할 때 공기 중에서 막대한 양의 입자와 가스가 방출된다. 대형 화산의 분출은 이산화황 가스를 상층 대기(성층권)에 주입하여 그것이 물과 반응하여 황산운을 형성함으로써 기후에 영향을 준다. 이 구름은 태양광선을 차단하고 우주로 돌아가게 하기 때문에 에너지가 지표에 도달하지 못해 하층 대기와 지표가 냉각된다.
1815년 인도네시아 탐보라 화산 폭발의 경우 이산화황이 연직 44km까지 도달하여 성층권으로 확산되었으며, 이로 인해 1815년 전 세계 연평균 온도가 5℃ 하강하여 여름(6월) 북미 지역에 50cm, 폭설 등 이상 기후가 발생하였고, 1816년에는 평균 지구 온도를 0.4-0.7°C(0.7-1°F) 낮추는 심각한 기후 이상으로 여름이 없는 해로 알려져 있다. 1816년 유럽의 여름 기온은 1766년부터 2000년 사이 기록상 가장 추웠다. 이로 인해 북반구 전역에서 농업 실패로 심각한 식량 부족이 발생하였다. 역사학자 John D. Post는 이를 “서구 세계의 마지막 생존 위기(The Last Great Subsistence Crisis in the Western World)”라고 불렀다. 1816년의 기후 이상은 대부분의 뉴잉글랜드, 대서양 캐나다와 서유럽 일부 지역에 가장 큰 영향을 미쳤다.
담보라가 전 세계적인 기후 패턴에 과격한 영향을 미친 것은 부분적으로는 탐보라 폭발 당시 이미 불안정한 기후 조건 탓도 없지 않았다. 1808년 남태평양(?) 열대 지방의 큰 화산이 폭발한 적이 있다. 이 폭발로 시작된 기온 저하가 1815년 담보라의 거대한 폭발로 극대화되었고, 이로써 1810년대 내내 극단적인 화산 기후가 확정되고 말았다.※ ※ https://en.wikipedia.org/wiki/1808_mystery_eruption
여러 세계사적 사건에 크게 들어간 작게 들어간 탐보라 화산 폭발 사건과 관련된 1810년대의 극단적인 기후가 영향을 미쳤다. 게렌 다시 우드(Gillen Wood)는 <세계사를 바꾼 화산 탐보라의>로 19세기 초 아일랜드를 강타해 많은 사람을 죽게 한 대기근과 전염병, 1830년대 세계를 대혼란에 빠뜨린 콜레라의 발생, 중국 윈난성이 20세기 초 세계 마약의 80%를 공급한 중국의 핵심 아편 산지로 떠오른 이유, 영국 근대문학의 대표작 <프랑켄슈타인>의 탄생, 공중보건과 복지국가 이념의 탄생 등 이 책은 전 지구를 강타한 하나의 사건으로 설명하고 있다.또 나폴레옹의 워털루 전투 패배도 탐보라가 몰고 온 폭우가 영향을 미쳤다는 주장도 있다.(https://www.imperial.ac.uk/news/187828/napoleons-defeat-waterloo-caused-part-indonesian/)
조선에서는 순조 16년(1816년) 흉년의 기록을 볼 수 있다. 순조 14년(1814년) 호구조사는 790만 명이었으나 순조 16년에는 659만 명으로 급감하였다. 130만 명이 줄어든 것이다. 이 모든 것이 아사했을 리는 없으나 흉년과 기근으로 화전민이나 도적이 되는 등 호구조사에서 이탈한 듯하다. 징수할 조세도 쌀은 25,000석이 부족했고 무명도 300동이 부족했다. 세입은 부족했지만 경상도에 8,000석의 구호미를 긴급 방출하는 등의 이유로 세출은 오히려 늘어 조선 후기 재정 붕괴를 가속화했다.
화산폭발지수(VEI) 7의 역사상 사례는 1815년 인도네시아 탐보라 화산, 1465년 미확인(상강?/1452~1453?), 1257년 인도네시아 사마라스(Samalas) 화산, 946년 백두산, 120~150년경 뉴질랜드 타우포 화산, 기원전 1610년경 에게해 미노스(테라) 화산 분화가 있다.※ 화산폭발지수(VEI) 6이상조회 : http://yellow.kr/vei.jsp 세계사를 바꾼 화산 탐보라 – 길론다시우드 / 류현식 역 / 소와단 / 2017.04.25
탐보라에 의한 기후변화는 가혹했던 나폴레옹 전쟁(1803~1815) 직후에 일어난 일이었기 때문에 언제나 시대적 분쟁이라는 그늘에 방치되어 있었다. 눈으로 볼 수도 없고 아무도 몰랐지만 사실 탐보라는 19세기 초 세계를 강타한 화산의 스텔스 폭격이었다. 캘커타(Calcutta)에서는 메스꺼운 콜레라를 일으켰고, 중국 윈난과 영국의 티론(Tyrone)에서는 농부 아이들이 굶주림에 시달렸다. 희망을 찾는 탐험가들은 북극해 북서항로를 따라갔고 미국 볼티모어의 부동산 투자자들은 파산에 이르렀다. 전 세계인은 불시계획에 화산이 이끄는 대로 운명의 길을 걸었다…… 탐보라 화산 폭발 이후 3년간 세계 거의 모든 지역에서 살고 있다는 것은 그야말로 배고픔을 의미했다. 뉴잉글랜드에서는 1816년을 여름을 잃은 해 혹은 1800년대에 얼어 죽을 뻔했던 해라는 별명으로 불렀다. 독일에서는 1817년을 거지의 해로 정했다. 전 세계적으로 가뭄과 서리 때문에 수확이 엉망이 되고 홍수가 농작물을 휩쓸고 말았다. 미국 버몬트 주에서는 고슴도치를 잡아먹고 쐐기풀을 삶아 먹고 중국 윈난 성에서는 흙을 핥아 먹었다. 여름에 프랑스를 여행하던 한 여행자는 거지 떼가 모여 있는 모습을 보고 군대가 행군하는 줄 착각하기도 했다… 나폴레옹 전쟁이 휘몰아친 유럽 대륙에서 수만 명의 제대 군인은 가족을 부양할 능력이 없었다. 그들의 절망은 광장에서 폭동을 일으켰고, 군사 작전을 방불케 하는 방화로 이어졌다. 유럽 정부들은 어느 나라든 혁명을 두려워했다. 비극은 누군가에게 축복이다. 지긋지긋한 기근은 1818년 풍작 후에 끝났다. 그 3년간 러시아와 미국 서부의 농민들은 전례 없는 큰 돈을 벌었다. 그들은 대서양 무역에서 절망적인 구매자에게 곡물을 천정부지로 팔았다. 이들을 제외하고 지구상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그때가 ‘최악의 시간’이었다…… 탐보라가 전 세계적 기후 패턴에 과격한 영향을 미친 것은 부분적으로 탐보라 폭발 당시 이미 불안정했던 기후 조건 탓도 없지 않았다. 6년 전인 1809년 열대지방의 주요 화산이 폭발한 적이 있다. 이 폭발로 인한 기온 저하가 1815년 탐보라의 거대한 폭발로 더욱 극대화되었고, 이로 인해 1810년대 내내 극단적인 화산 기후가 확정되고 말았다.… 1817년 벵골 지역에서 풍토병이 유례없이 만연한 이유는 새로운 변종 콜레라가 생겼기 때문으로 추정된다. 이 변종에 대해서는 원주민의 기존 면역체계가 도움이 되지 않았다. 신종 콜레라는 일단 벵골 지역에서 만연한 뒤 사방으로 퍼졌다.사람에서 사람으로 전염되면서 점점 강화되던 콜레라균은 어느 순간 전염성이 극도로 강화된 초강력 전염병이 됐다. 따라서 기본적인 전염 통로는 자주 왕래하는 사람들이었다. 군인, 순례자, 이동해야 할 상인 등이 콜레라에 감염된 채 인도 전역에 흩어져 항체가 전혀 없는 공동체에 들어간 게 1817년이었다. 이후 10년간 이들은 인도뿐 아니라 글로벌 무역망에도 들어갔다. 남동쪽으로는 네덜란드령 동인도와 동아시아, 또 북서쪽으로는 무역로를 따라 아라비아를 거쳐 러시아와 유럽, 마침내 아메리카 대륙까지 콜레라가 전파되었다. 결국 19세기에 콜레라에 의한 사망자 수는 전 세계에서 수천만 명을 헤아리게 되었다…… 콜레라가 기본적으로 미스터리였고, 19세기 수준에서는 치료를 시도할 정도로 병을 키울 뿐이었다. 불안에 휩싸인 사람들은 수많은 가설, 수많은 명령, 수많은 권위 있는 이론을 들을 수 있었다. 그러다 보니 콜레라는 역사상 가장 많은 사례보고가 이뤄진 병이 됐고, 전문의학적인 글과 일반인을 대상으로 한 글이 무수히 쏟아졌다. 연구 규모나 대중적 관심사로 보면 20세기에 그에 버금가는 질병은 에이즈(AIDS)뿐이었다. 콜레라와 에이즈는 문화적으로 비슷한 양상을 보였지만 콜레라는 근대적 공중보건체계에서 접근한 최초의 질병으로 유럽 전역에서 새로운 보건행정체계가 구축되는 계기가 됐다. 역사학자 크리스토퍼 햄린이 말했듯이 콜레라는 19세기의 양심을 움직였다.” 왜냐하면 당시 유럽에서 새롭게 발달한 도시빈민층에 처음 주목한 계기가 되었고 오늘날과 같은 전문화된 공중보건 개념이 그때 처음 나타났기 때문이다… 따라서 탐보라 기후변화가 만들어낸 괴물전염병 콜레라가 19세기 역사에 끼친 영향은 아무리 강조해도 과언이 아니다. 콜레라는 그 자체가 인류의 진보에 대한 모욕이었다. 콜레라는 당시 유럽과 북아메리카 지역을 주도하던 부르주아에 대한 신뢰를 깼다. 새로운 세계 시장의 약점이 질병에 노출됐기 때문이기도 하고, 동시에 콜레라가 만연한 슬램 지역에서 경제적 불평등이 노골적으로 나타났기 때문이기도 하다. 1831~1832년, 1848년, 1871년 등 주요 혁명이 빈번하게 일어난 시기를 보면 콜레라와 계급투쟁의 연관성을 짐작할 수 있다. 1800년대 중반부터 탐보라가 주도한 콜레라는 14세기 흑사병에 버금가는 재앙을 가져왔다. 흑사병 당시에도 민중봉기와 반란이 잦았다. 콜레라는 빅토리아 시대의 최악의 악몽이었다. 콜레라의 증상이 나타나기 시작하자 상상할 수 있는 가장 굴욕적인 방법으로 배설 기관이 작동하여 주로 가난한 사람들과 억압받는 사람들을 희생시키기 때문에 근대 사회가 번영에도 불구하고 얼마나 자비롭지 않은지를 극명하게 보여주었다. 노예제도 폐지 논란으로 인종 문제가 정치적 화두로 떠올랐다. 그래서 노예뿐만 아니라 보건문제가 19세기의 가장 주요한 사회정의 문제로 간주되었던 것이다… 예를 들면 중국의 하이난도(해남도, 하이난도)는 위도상 열대지방에 속하지만, 그래도 1815년 여름에 눈이 내리고 겨울에는 강추위로 숲속의 식물의 절반이 죽고 말았다. 중국 동부 지역에서는 탐보라 시기에 지속적인 저온으로 흉년이 들어 고통을 받았다. 산서지역에
◎ 2차(1826-1837): 1826-1837 cholerapandemic-Wikipedia
◎ 3차(1846-1860): 1846-1860 cholerapandemic-Wikipedia 3차 콜레라 전염병은 19세기 인도에서 시작된 콜레라의 세 번째 주요 발병으로 국경을 넘어 여러 나라로 전파되었다. 러시아에서는 100만명 이상이 콜레라로 사망했다. 이 전염병은 19세기 전염병 중 가장 치명적인 전염병으로 인식된다.아시아, 유럽, 아프리카 및 북미 지역에서 높은 사망률을 보였다. 최악의 해로 꼽히는 1854년 2만3000명이 영국에서 사망했다.1854년 런던의 가난한 지역에서 의사로 일하는 존 스노(John Snow)는 오염된 물이 질병의 전염 수단임을 확인했다. 1854년 브로드스트리트 콜레라가 발생한 후 그는 런던 소호 지역에서 콜레라 사태를 연구했다. 한 지역의 수도펌프 인근 사례를 계속 기록했다. 자신의 주장을 확신하기 위해 공무원들에게 물펌프 손잡이를 제거하도록 설득해 오염수를 마시지 않도록 조정했고 콜레라는 곧바로 줄었다. 그의 이론은 전염병 통제에 큰 도움이 되었다. 존 스노우는 1849년 콜레라 발생을 방지하기 위한 런던 역학협회의 창립인이자 역학의 아버지 중 한 명으로 알려져 있다.역사저널 그날 8 : 순조부터 순종까지 – KBS역사저널 그날 제작팀 / 민음사 / 2017.01.13
그날 : 그래서 성군은 하늘이 내린다고 하잖아요. 이 당시라면 자연재해 앞에서는 속수무책이었을 텐데요. 이런 날씨가 과연 역사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김문수 교수를 통해 좀 더 자세히 알아보겠습니다. 순조로울 때 수재와 한재가 특히 심했어요?
김문수 : 1810년대는 지난 600년 내내 여름이 가장 시원했던 시기였습니다. 한국의 옛 기후에 대한 최근 연구에서도 19세기 초 조선에서 이상저온 현상이 두드러졌음이 밝혀졌습니다. 그래서 순조로울 때는 모내기 봄에 가뭄이 들거나 농작물이 잠시 자라야 할 시기에 홍수가 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이로 인해 땅을 떠난 굶주린 백성들이 유리하게 거지하면서 전국적으로 불안이 야기되었습니다. 기근의 영향이 나타내는 극단적인 형태는 민란입니다. 순조가 재위한 기간은 이른바 민란의 시대에 접어드는 시작이었고, 그 배경에는 기근이 있었습니다… 김문기: 조선시대 내내 가장 많이 행해진 것이 기우제입니다. 순순 때도 가뭄이 심했던 1809년에는 9회, 1814년에는 10회, 그리고 홍경래의 난이 일어난 1811년에는 무려 14회나 일어났습니다… 최태성: 기후변화는 조선에도 영향을 미쳤는데 당시 다른 나라에는 또 어떤 영향을 미쳤을까요?
김문수: 세계적으로도 1815년에 인도네시아 탐보라 화산이 폭발하면서 흐린 날씨가 이어졌습니다. 이 기간에 유럽과 미국에서는 한여름에 눈과 서리가 내리고 식량을 구할 수 없게 되자 물가는 치솟고 곳곳에서 폭동이 일어나 전염병이 유행했습니다. 이러한 환경 위기 속에서 유럽은 석탄이라는 새로운 에너지를 이용하여 전근대라는 터널을 헤쳐나갈 수 있었지만 동아시아는 그렇게 할 수 없었습니다. 이처럼 기후변화에 인간이 적절히 대응하지 못할 때 기후는 결정적으로 작용할 수도 있습니다. 따라서 역사에서 기후의 영향력을 결정하는 것은 인간의 대응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C. 문명의 붕괴 – 제레드 다이아몬드 / 민음사 / 2017.01.13
다음으로 고려해야 할 요인은 기후변화이다. 인간에 의해 야기된 지구 온난화와 관계가 있다고 생각된다. 실제로 기후는 점점 더워지거나 추워지거나 습하거나 건조해질 수 있다. 어쨌든 인간의 행위와는 아무 상관이 없는 자연력의 변화 때문에 기후는 몇 달 혹은 몇 년 주기로 변덕스러울 수 있다. 태양열 온도 변화, 화산재를 대기로 내뿜는 화산 폭발, 지축과 궤도의 변화, 지구 표면을 뒤덮은 육지와 바다의 분포 변화 등에 따라서도 기후는 달라진다. 자연스러운 기후변화 사례에서 자주 언급되는 예는 200만 년 전에 시작된 빙하기, 정확히 말하면 기원 후 1400년부터 1800년까지 이어진 소빙기(Little Ice Age)에 형성된 빙판의 이동, 그리고 1815년 4월 5일 인도네시아 탐보라 화산이 거대한 폭발을 일으킨 후 찾아온 저온 현상이다. 탐보라 화산 폭발로 막대한 화산재가 상층 대기로 치솟고 지표에 이르는 햇빛의 양이 크게 줄어 저온 현상이 엄습했다. 이 때문에 1816년(여름을 잃은 해) 여름에 곡물 생산량이 크게 줄었고, 북아메리카와 유럽까지 기아로 고통받았다.인간의 평균 수명이 짧고 오늘날처럼 문자가 보편화되지 않았던 과거 사회에서 기후변화는 훨씬 심각한 문제를 일으켰다. 많은 지역에서 기후는 연간 단위가 아닌 수십 년 주기로 바뀌는 경향을 띠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강우량이 수십 년 동안 줄곧 평균보다 많아도 가뭄이 반세기 지속되는 경우가 있었다. 선사시대 인간 사회에서 부모의 출생부터 자녀의 출생까지의 평균 연수는 불과 수십 년이었습니다. 따라서 수십 년간 지속된 습한 기후가 끝날 무렵에는 그 앞에 닥친 건조한 기후를 직접 체험한 사람이 거의 남아 있지 않았다. 오늘날에도 좋은 기후가 계속되는 수십 년 동안 생산이 증가하여 인구가 증가하는 경향을 띠고 있다. 그런 기후가 영원히 지속되지는 않을 것이라는 과거의 경험을 깨끗이 망각하고 사는 것이다. 따라서 그런 시기가 끝나면 사회는 늘어난 인구로 지쳐 새로운 기후에 적합하지 않은 습성을 쉽게 떨쳐버릴 수 없다. …… 이 모든 점을 고려하면 과거 사회는 기후변화에 속수무책일 수밖에 없었다.<관련도>
- 탐보라 화산의 위치
- 1815년 탐보라 폭발 전후
- 탐보라 화산재 두께 탐보라 화산운이 떨어져 쌓인 화산재 두께를 보여주는 지도.(플리니식 분출은 수직으로 솟아 있기 때문에 화산재가 쌓이는 점위가 상대적으로 좁다) 무역풍에 의해 화산재는 북쪽과 서쪽으로 술라웨시 섬과 보르네오 섬까지 1300킬로미터나 퍼져나갔다. 1815년 4월 10일의 폭발음은 멀리서도 두 번이나 들렸다.
- 에든버러 강풍일수 그래프에서 알 수 있듯이 에든버러에서 측정한 강풍일수는 탐보라 폭발 이후 급증했다. 두 번째로 그래프가 급등한 지점은 1883년 크라카타우 화산 폭발 이후 기상이 불안정한 때이다.<참고 자료 및 관련 자료>
- 1815 eruption of Mount Tambora-Wikipedia Year Without Summer-Wikipedia History ofcholera-Wikipedia http://earth.org/data_visualization/pandemic-map-cholera/ 화산은 기후 변화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2016-12-01 백두산 ‘천년폭발’ 탐보라 화산보다 컸던 2015-04-10 인니탐보라 화산 대폭발 200주년…관광지로 부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