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산재 위에 부활한 기적의 도시 카타니아

시칠리아는 로마를 비롯한 다른 이탈리아 지역과 사뭇 다르다. 오히려 스페인 남부의 한 지역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절로 들 정도다.그럼에도 누군가 말하길 팔레르모는 로마와 닮았고 카타니아는 밀라노를 닮았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나는 이 말에 전혀 동의할 수 없어.시칠리아라는 독특한 환경이 이탈리아 본토와는 전혀 다른 이색 문화를 남겼는데 어떻게 그들의 문화를 본토와 비교할 수 있을까.오히려 나는 이렇게 말한다.결코 아니다. 팔레르모는 팔레르모일 뿐 카타니아는 그저 카타니아일 뿐이라며 팔레르모가 세월의 흔적이 고스란히 묻어나는 빈티지한 도시라면 카타니아는 모던함이 물씬 풍기는 멋진 도시라고 나는 자신 있게 말한다.

신이나 대자연은 때때로 인간에게 엄청난 재앙과 큰 축복을 안겨준 빼앗고, 또 주고 빼앗고는 한다.심술궂은 듯이 말이다.인류 역사에서 이처럼 축복과 재앙을 늘 업보처럼 안고 살아온 대표적인 지역이 바로 나일강 유역의 이집트 문명권이었다. 지금은 아스완댐 건설 후 치수 사업의 성공으로 나일강의 범람을 까맣게 잊고 살게 되었는데. 대자연은 몇 년에 한 번 주기적으로 나일강을 범람시켜 인간이 영위하던 삶의 터전을 하루아침에 싹쓸이했다. 이처럼 연이은 재앙이라면 이집트 땅에는 아무도 살지 않는 폐허가 됐어야 했다. 그러나 범람하는 홍수는 나일강 상류에서 질 좋고 풍요로운 토양을 쓸어내려 나일강 유역에 뿌렸다. 세상 어디에도 없는 기름진 옥토가 이 범람 덕분에 항상 그대로 유지될 수 있었다. 전 지구를 통째로 털어 가장 훌륭한 농지를 나일강 유역의 평원으로 꼽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었다. 속된 표현으로 한 해 농사를 지으면 다른 지역의 3년 내지 사년 농사의 소출을 얻을 수 있는데 누가 나일강을 떠날까. 그것은 재앙이자 축복이었다.시칠리아도 마찬가지였다.유럽 전체에서 가장 높은 곳(해발 3.350m)에 위치한 살아있는 에트나 화산은 기원전 2.700년부터 활동을 시작해 지금 이 순간에도 여전히 진행형이다.그리스 로마 신화에 등장하는 불의 신이자 대장간인 헤파이트스의 대장간이 있는 곳이 바로 이곳 에트나 화산 분화구다.1669년 거대한 용암을 분출한 에트나 화산 활동은 카타니아를 현실 세계 역사에서 검게 지워버렸다. 카타니아는 사라졌다.붉은 용암이 범람하는 홍수처럼 도시의 도로와 골목으로 공들여 흘러들면서 주변 들판과 언덕을 포함한 카타니아 인근 지역 전체를 검은 화산재가 묻혀버렸다. 도심에 살던 2만 명 이상의 사람들이 화염 속으로 사라졌다.카타니아는 사라졌다. 역사에서 지도에서 모두 사라졌다. 산적한 검은 화산재만이 구릉과 언덕과 황량한 벌판을 이루는 생명체와는 살지 않는 지역으로 하루아침에 변해간 것이다. 이후에도 착실히…. 그리고 현재까지도 화산은 활동을 자주 하여 사람들을 놀라게 하고 막대한 피해를 양산시키고 있다.재난이 몰아친 지 100여 년이 지나면서 사람들이 다시 카타니아 지역에 나타나기 시작했다.까맣게 뒤척이던 용암과 화산재를 뚫고 올라오는 푸르스름한 녹색 생명체에서 느끼는 감동처럼 다시 찾은 사람들은 그들의 피땀과 정성과 노력과 카타니아인이라는 자부심으로 용암 더미와 화산재 위에 생명의 씨앗을 뿌리며 건물을 하나둘 새로 짖고 물을 끌어와 도로를 닦고 교회를 세웠다. 위대한 인간 승리였다.카타니아의 대부분의 건물들은 이 재난 덕분에 18세기 이후에 지어진 모던한 이탈리아풍의 분위기를 가진 세련미를 자랑한다. 재난을 견딘 일부 건물은 대부분 웅장하게 대리석이나 화강암으로 지어진 석조 건축물로, 그 역시 오랜 시간과 정성을 담아 복원에 성공한 사례라 할 수 있다.도시 어디서나 하수도 정도의 깊이만 파내면 옛 유적이 나온다. 신전, 집터, 도로와 하수 시설이 모습 그대로 화산재 아래에 묻혀 있다. 문화유산의 보고가 아닐 수 없다. 다만 개발과 보존이라는 명제 앞에서 일단은 판 상태로 그대로 두는 것이 더 나은 방법이 아닐까 싶다.이미 그 유적의 산 위에 세워진 고층빌딩과 현대식 주거환경과 도시를 어떻게 만들 수 있을까.

기원전 6세기경부터 그리스인들이 바다를 건너와(시라크사)에 처음 도시를 세웠고 이어(카타니아)를 새로운 시칠리아의 거점도시로 발전 융성시켰다. 이어 카르타고가 식민지로서 지중해의 중요한 해상무역 전진기지 역할을 했고, 로마와 비잔틴 시대 들어서는 눈부시게 번영을 누릴 당시로서는 최첨단 항구도시였다.이슬람이 세력을 넓혀오자 기독교 세력은 카타니아와 시라크사를 중심으로 치열하게 항전했고, 결과적으로 이곳의 점령을 포기한 이슬람은 바다를 돌아 북서부 해안을 따라 새로운 거점으로 팔레르모를 건설했다. 이때부터 카타니아와 시라크사는 급격히 쇠퇴의 길을 걷게 됐다. 그러던 중 에트나 화산이 폭발해 카타니아를 그대로 삼켜 지상에서 사라지게 했고, 시라크사는 정복자 이슬람에 의해 기둥 뿌리 하나 이루지 못할 정도로 끔찍하게 파괴된 것이다.

비장하면서도 아름답고, 젊고 활기찬 …………..정말 매혹적인 도시 ‘카타니아’.

골목 한가운데 노란 녹색 깃발 건너편이 이번 카타니아 여행에서 내가 머물렀던 빌라형 게스트하우스다.

탁월한 선택. 유쾌한 착각. 땀 염색 걷기 투어

팔레르모에서 선물처럼 공교롭게도 멋진 숙소에 머물렀던 휴유증이었을까?당연히 카타니아에서도 그런 행운이 함께 있으리라 믿었다.그 내용은 아주 간단하게 대충 이랬어. 팔레르모 센트럴(역)과 숙소(호텔)는 도심의 정반대 방향에 놓여 있었다. 매일 다른 지역으로 나가기 위해 역과 터미널까지 걸어가기에는 상당한 거리였지만 팔레르모의 모든 유적과 문화재를 굳이 찾지 않아도 매일 지나가며 다시 만날 수 있는 즐거움이 상당했기 때문이었다.팔레르모 호텔을 체크아웃하기 전에 카타니아 호텔을 한번 검증해 보고 한 숙소를 골라 주소를 메모해 두었다. 터미널과 역사에서는 반대편으로 떨어져 있지만 대부분의 유적과 문화재가 도심 중심에 모여 있는 카타니아에서 다시 오가며 누리는 여행자들의 즐거움을 만끽해 보기로 한 것이다. 시칠리아에서 가장 큰 도시가 팔레르모라면 두 번째 도시인 카타니아 도심을 가로질러 걷는 게 좀 더 편하지 않겠느냐는 추측에서였다.어디까지나 지금까지는 너무나 탁월한 선택이었다.이때까지는요………………………………………..

카타니아 어디에서나 하얀 눈을 터번처럼 머리에 쓴 에트나 화산의 멋진 풍경이 보인다.어느 멋진 여행을 예감하며 2시간 반의 버스 여행 끝에 카타니아 버스터미널에 내렸다. 조금 낙후된 어느 시골 장터 뒷골목 같은 허름한 공터가 터미널이었다. 매표소는 조금 떨어진 건물 1층을 3, 4개 업체가 구분해 운영하고 있었다. 마치 감 터미널 정도랄까…20kg에 육박하는 배낭 2개를 앞뒤로 메고 버스터미널 부스를 찾아다니며 다음날부터 어느 근처 여행지로 가는 버스 시간표를 찾아 메모한다. 그리고 다시 큰길을 건너 약 300m 떨어진 카타니아역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역시 시간표를 확인하고 메모해서 나오는데 업무하는 역사는 작아 보이지만 역사 건물 자체는 엄청 크고 이슬람 분위기가 확 느껴지는 멋진 건물이야. 역시 카타니아에 대한 나의 기대는 전혀 어긋나지 않은 것처럼 느껴졌다.센트럴역 광장 옆에 멋진 분수가 있지만 어디에도 안내판이 없다.잠시 분수대 주변을 돌며 조각상을 감상해 보았는데, 추론되는 것은 아마도 바다의 신 넵튠(포세이돈)이 암피트리텔로를 유혹하여 저지르는 장면으로 알려져 이들 사이에서 트리톤이라는 절반은 물고기로 반은 인간인 아이를 낳는 그리스 신화를 형상화한 것으로 추측되었다. 겨울이라 그런지 분수는 터지지 않았다.그리고 주소와 지도를 가지고 숙소를 찾으러 나갔다.비토리오 에마뉘엘 거리(이탈리아에는 어느 도시든 중심 도로는 무조건 비토리오 에마뉘엘 거리)를 따라 걸으면 무조건 그 도시의 중심부에 닿는다. 팔레르모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현대적인 도시가 나타난다. 수많은 교회나 상점들을 지나면 광장도 보이고… 그렇게 걷다 보면 카타니아의 심장부 카타니아 두오모가 드디어 모습을 드러낸대.여기가 바로 (카타니아)다. 드디어 내가 거기 서 있다.온몸이 이미 땀에 흠뻑 젖었다. 1월 말 카타니아는 영상 12도에서 14도를 웃도는 온화하고 따뜻한 지중해성 기후이자 날씨였기 때문이다.카타ー니아의 상징인 검은 코끼리의 동상이 서는 광장 한편에 늘어선 노점 카페에 위치한 생맥주 한잔을 주문해서 마신다. 이는 생맥주가 아닌 생명수이다.오·마·이·갓·어· 멘 땀이 식기를 기다리고 교통 경찰에 제가 가지고 있는 주소와 지도로 목표 지점을 다시 한번 확인하고 다시 기운을 내고 배낭을 메었지만……자 여기서부터는 오르막이다. 로마 시대의 포장 도로가 현재도 사용되고 있는 돌멩이가 꽉 찬 좁은 비탈길을 오르내리는 자동차 사이를 누비고고 또 오른다. 풍류와 낭만적인 여행은 어딘지 모르게 아래 광장에서 버렸다. 삐뚤거리는 고갯길은 계속됐다.잠시 오르자 비로소”베르니 공원”이 나타난다.공원도 땀에 흠뻑 젖은 채 횡단 보도 앞에서 한참 고민에 빠진다.”어머. 이 거리를 감수하고 여기에 머물면서 매일 터미널과 역을 오가야 하니?”‘와 자문할 “적어도 중간은 넘어도 두오모와 생선 시장 정도 거리에 숙소를 옮겨야 하는 것은 아닐까?”아마에 일리가 있는 스스로에게 던진 지적이었다.그런데 그때……횡단 보도 건너 편의 건물이 슈퍼 마켓이 아닌가. 제법 규모 있는 대형 마트였다. 옆을 돌아보면 정말 귀여운 과일 가게도 보인다. 뿐만 아니라 대형 제과점에 보이는 마트의 건너 편의 집안도 매우 큰 대형 마트이며 베이커리는 마트 안의 일부 코너였다.현지인들이 보편적으로 이용하는 마트와 재래 시장과 일반 음식점이 가까이 있다는 것은 배낭 여행자에게는 너무 큰 위안이 된다.터미널과의 거리는 상당히 있었지만 거리의 분위기가 무척 마음에 든다.약국을 지나서 밖에 간판마저 없다 액자 사이즈의 안내판이 모든 호텔(게스트 하우스)을 드디어 찾기가 지나치게 찾았는데……………………………………………………………….나중에 알면 근처에서 꽤나 유명한 피자 집이었다. 흐흐흐 더 생각하는 것은 뭔가 있어?4층짜리 복합건물 3층만 가족이 운영하는 아주 작고 아담한 게스트하우스 더블룸을 4일간 이용하기로 했거든. 마침 방이 하나만 남아 있었다.

공존. 산 프랑스의 성당과 수도원(Chiesa & Monasterodi San Nicola)……그리고 시칠리아 종합대학.

공존이다. 이상하게 여기서는 비슷한 의미의 ‘공생’이나 ‘공생’의 의미보다는 반드시 공존이라는 표현을 하고 싶어졌다. 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초기 기독교회는 아마 이런 느낌이었을 것이다.교회(성당)라는 곳이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칭찬을 뒷받침하는 거룩한 곳이라는 미명 아래 오로지 크고 화려하게 꾸며져야 하고, 더 높은 종탑을 세워야 하며, 더 많은 신도들을 모아 자신들의 지상에서의 업적을 증명해 보여줘야 구원을 얻는, 천국에 갈 수 있는 형이하학적 보수적 집단으로 전락한 오늘날의 현실 속에서 이 상처투성이의 낡은 교회는 나에게 많은 생각과 기억하면서 하나님에 대한 구원이나 인간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존경하는 한 방편으로 나름대로 한 줄기 빛 같은 느낌으로 내게 다가온다.2000년 전 유대인의 땅에서 행해진 구세주의 행위는 바로 혁명이었다.천지개벽이라고 해도 과언이긴 한 것이다. 유대민족은 이 혁명적 발상을 도저히 납득하거나 인정받지 못했다. 그리고 그것들은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았다. 그러나 예수님은 다시 부활하셨다. 혁명은 계속된 것이다. 혁명은 세계로 퍼져나가 세계를 지배하던 로마제국은 칼과 창으로 싸우는 영토전쟁이 아닌 인간의 영혼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싸움에 위기를 느끼고 기독교를 잔혹하게 탄압했다. 그들은 지하에 숨었다.’카타콤베’는 ‘생활공동체’였다. 또 그곳이 ‘교회’였다. 같이 기도하고 같이 먹고 같이 잤어. 우리는 그때까지의 시기를 ‘의 초기 교회’라고 한다.시대 상황과 정치성이 결합된 설교나 종파에 따른 각기 다른 해석은 필요 없었다. 다만 조상 대대로 전통처럼 이어져 온 구약과 예수의 행적에 대해 옛이야기를 전하듯 입에서 입으로 전했다. 그럼에도 이념이나 교리에 대한 대립이나 다툼은 거의 없었다.또 가타콤베는 학교였다. 자라나는 아이들에게 성경을 읽을 수 있도록 글을 일깨우고 지하 동굴 밖으로 나가 굶주린 이리 떼처럼 기독교인을 사냥하고 있는 현실 속에서 고난을 이겨낼 수 있는 지혜를 가르치는 학교였다. 스스로 신앙을 유지할 수 있는 세계만이 그들의 유일한 목표이자 희망이었다.그러나 313년이 지나면서 교회는 달라졌다. 아니, 심하게 변질됐어.억압된 사람들의 종교에서 하룻밤 사이에 로마제국이라는 지배자의 종교로 전락한 것이다.근본을 잊은 일부 종교 지도자들이 앞장섰다. 자신들의 입장과 취향에 맞게 교리를 앞세워 정당성을 내세우며 기독교를 새롭게 재창조한 것이다.그들은 세계의 모든 것을 차지했고 세계에서 가장 높은 자리에 올랐다.그들은 그것들을 유지하고 마음껏 누리고 싶어했다. 초대 교회는 까맣게 잊었다. 아니, 파지 않으면 언제든지 장애물이 될 것 같아 온갖 방법을 동원했다. 어느 순간 기독교(예수를 따르는 대다수 종파)는 인류 역사상 가장 오래되고 가장 강력한 보수 집단으로 전락했다. 이제 그들에게 혁명은 이단입니다. 절대 악이 됐다. 지동설이 그렇고 종교개혁이 그랬다. 생명공학이라는 분야가 그들의 신성함에 위협으로 다가오기 시작하고 훗날 누군가가 ‘타임머신’이라도 개발하게 된다면 그들은 그때는 정말 매우 심각하게 위기를 절실하게 느끼게 될지도 모른다. 어쩌면 모든 것을 하루아침에 잃을지도 모른다는 각오를……하나님의 재림? 인간의 구원?허구한 날에 그들이 외치듯 기독교 자체에 지금…… 재림이나 구원에 대해 한 줌 정도의 관심이라도 있을까. 오로지 구실이자 방패일 뿐이다.자신들이 이미 가져온 수많은 것들 가운데 단 하나도 내놓거나 빼앗기지 않으려고 몸부림치는 거대한 괴물 덩어리일 뿐이다.그런 오늘의 슬픈 현실 속에서…….

산 니콜라 대성당과 수도원은 교회이자 학교이다. 카타니아종합대가 바로 이 성당이다.오전에는 이방인에게 방문이 허용되지 않는 곳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겨울방학 중이라 내부로 들어갈 수 있었다.성 니콜라스를 기념하기 위해 1578년 지어진 성당과 수도원은 1669년 있는 에트나 화산 폭발로 재건이 불가능할 정도로 완전히 파괴됐다. 한동안 버려졌던 이곳을 (베네딕토 수도회)에서 매입하여 많은 비용과 시간을 들여 현재의 모습으로 복원하였다.베네딕토 수도회(Benedictine Order)란 기독교가 로마 제국의 국교(313년)가 되면서 권력과 세속적인 일탈을 맛보며 변질되어 간 시기로부터 약 300년 뒤인 529년 성 베네딕토가 이탈리아 몬테 카시노에 창립하면서 전 유럽에 전파된 수도회의 일파이다. 이들은 기독교(로마 가톨릭)의 세속적 변질을 우려하고 두려워하며 청빈함으로 공동체 생활을 하면서 성경 공부에 몰두하는 등 엄격한 수도생활을 기본으로 했다. 한편 성경공부와 함께 다방면의 학문적 연구를 게을리하지 않고 수많은 학자와 인재를 발굴하기도 하였다. 이들은 로마 가톨릭과 같은 변질된 교회가 아닌 초대 교회의 전통과 구세주의 가르침이 세상에 전파되고 확산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해 오고 있다.움베르토 에코의 소설 ‘장미의 이름’에 등장하는 윌리엄 수도사(숀 코너리)가 베네딕토 수도회 소속 대표적인 사례의 모습이라 할 수 있다. 그런가 하면 윌리엄이 “악마는 바로 당신이다”라고 지목한 노사제 ‘호르헤’의 광기 어린 모습이 바로 당시 ‘로마 가톨릭’의 모습이었다.살인사건의 발단이 된 일리스토텔레스의 시편은 어떤 내용이었을까.그런가 하면 댄 브라운의 소설(다빈치 코드) 시리즈에 자주 등장하는 것도 바로 베네딕트 수도회다.

참으로 아름다운 풍경이다.교회와 학교가 공존하는 매우 특별한 현장이다.교회는 절대 아니라고 부인하지만 오랫동안 교회는 역사의 현장 바닥이 아닌 높은 곳에서 권력의 옆자리를 차지하며 자신들만의 지위를 누려왔다.이제는 바뀔 때가 됐다.교회와 학교, 교회와 병원… 이런게 초대 교회의 모습의 일부가 아닐까?이제 교회 스스로 내릴 것을 내려놓고 제 자세로 돌아갈 때가 아닐까.연일 언론에서 화제가 된다… ‘미투 사건에 성직자 유카리’ ‘대형 교회의 당 회장을 세습 상속하려는 문제’ ‘의연금의 투명하지 않은 사용’ 등 너무나 많은 경악할 일이 교회에서, 그것도 대형 교회에서 한두 번으로 일어나지 않았는가?”그런 당신들에게 신은 과연 무엇인가?” “그런 당신에게는 신의 눈에 비치고 있는 당신 자신의 모습은 어떤 모습이든 아무 상관이 없을까?” 필요하다면 언제든지 떨쳐버리거나 버릴 수 있는 신이 당신에게 필요한 신이니까요…”혹시 당신들과 신을 구별할 수 없는 경지에 이른 것은 아닐까?’

산 니콜라 성당(카타니아종합대) 건물 안 지하와 정원 지하 곳곳에는 고대 그리스 유적이 그대로 남아 있다. 발굴과 조사와 복원공사가 한창이다. 이처럼 카타니아 어디를 가든 화산재와 용암을 제거하면 고대 문명이 모습을 드러낸다. 실제 그 시대 도시의 모습은 어땠을까. 나는 너무 궁금해.베네딕토회에 의해 재건된 교회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연합군의 지휘부로 사용되다 파시스트군과 독일군의 폭격으로 다시 심하게 파괴됐다. 현재 교회와 대학 정문 부분에 잔혹했던 폭격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전후 베네딕토 수도회에 반환된 것을 카타니아 시가 매입해 복원 작업을 거쳐 ‘카타니아 종합대학’으로 사용하고 있어 밝은 젊은이들의 대학 캠퍼스 생활을 조금이나마 느낄 수 있다.

카타니아종합대학(산 니콜라 성당) 정문을 거쳐 본관 건물에 들어서면 비잔틴과 이슬람 약식이 혼재된 멋진 노르만 양식의 대리석 계단이 나타난다. 마치 이것은 건물의 부속 계단이 아니라 이 계단 하나만으로도 하나의 건축물처럼 여겨질 정도였다. 심플한 분위기가 그대로 살아 있는 멋진 계단이었다. 사방 벽면에 시칠리아와 성경 속 이야기를 부각시킨 조각 장식이 벽면에 붙어 있었는데…… 그 중 가장 눈에 띄는 것이 바로 아가타 성녀의 부조였다.카타니아 출신의 아가타 성녀는 동정녀의 몸으로 신앙을 지키려다……마침내 가슴을 절단당하는 잔혹한 형벌에 처해졌다.

카타니아를 걸을 때는 어디서나 자신의 발밑에 또 하나의 고대 도시가 잠들어 있다고 생각하면 된다.그렇게 골목을 따라 걷다 보면 표지판에 (그리스 로마극장과 오데온)이라는 간판이 나타난다. 골목 양쪽에 길고 실제로 사람들이 거주하고 있는 건물 앞에 갑자기 작은 안내판이 보인다고나 할까. 잠시 당황하며 주변을 살피다 보니 주거건물의 열린 큰 출입문 안쪽으로 역사책과 사진만으로 많이 접한 낯선 풍경이 살며시 고개를 내밀고 있다.그리스인들이 만든 반원형 극장이다. 로마 시대에는 오데온(Odeon)이라는 공연이 실제로 열렸던 오늘날의 오페라 하우스나 극장 같은 곳이다.에트나 화산 폭발 이후 다시 도시를 건설한 사람들은 땅을 깊이 파서 그 안을 볼 여유가 없었다. 그래서 돌멩이가 나오면 파서 버리거나 건축 자재로 쓰면서 하나둘 건물을 짖기 시작하여 새로운 도시를 건설하였다. 땅속의 고대 유적은 오랫동안 방치되어 모두의 기억에서 잊혀졌다.20세기 들어 곳곳에서 재개발과 도로와 상하수도 공사를 하다 보니 그동안 방치했던 고대 유적들이 다시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동시에 사람들은 잊혀진 역사와 묻혀 있는 유적 유물 두 가지 고고학적 가치에 대해 재고하기에 이르렀다. 늦은 감이 있지만 이들은 보존과 복원에 심혈을 기울이기 시작했다.그 결과 이처럼 현대적 주거시설과 고대 유적이 시간과 공간을 넘어 절묘하게 또 하나의 새로운 조화를 이루는 문화를 탄생시키고 있는 것이다.정말 이색적인 풍경이다.현대 도시인의 삶 속에 녹아든 고대 문화의 옛 정취라고 할까…… 그리스의 로마 극장과 오데온을 만났다.

카타니아는 교회 집약적 도시라고 할 수 있다.시칠리아에서 팔레르모에 이어 두 번째로 큰 도시라고 하는데, 우리 견해로는 결코 그렇게 큰 도시라는 게 좀 그런 느낌도 들지만 도심 어느 골목을 가든 사방에 교회로 넘쳐난다. 로마를 비롯한 ‘이탈리아가 다 그렇다’고 생각하겠지만 카타니아에서는 특히 그런 느낌이 더 강하게 느껴진다.카타니아는 아카타 성녀의 도시라고 할 수 있다.시칠리아 출신으로 순교해 성녀로 추앙받는 4명의 여성이 있는데, 그중 아가타 성녀는 이곳 카타니아의 수호 성녀다. 이제 카타니아를 여행하면서 어디서나 더 많은 아가타 성녀의 모습을 만날 수 있다.카나니아는 오페라의 거장 벨리니의 도시라고 해도 무방하다.어딜 가나 벨리니 동상을 자주 볼 수 있고, 카타니아인과 음악 이야기가 나오면 이야기의 99%는 벨리니에 대한 이야기다. 이들에게 음악이란 벨리니에서 시작해 다시 벨리니로 종결된다고 봐도 틀림없다. 이들의 벨리니 사랑은 절대적이다.하지만 우리에게 벨리니는 매우 낯선 음악가가 아닐까.카타니아에서 가장 넓고 커서 시민들이 가장 사랑하고 가장 많이 찾는 공원도 벨리니 공원이다.카타니아 역사에서 카타니아를 위해 헌신하고 기여한 사람들을 만날 수 있다.

— 카타니아는 아주 많은 추억과 여행 이야기를 가지고 있는 멋진 도시입니다. 그래서 조금씩 나누어 더하기로 하고 다음 이야기에서는 절벽 위의 아름다운 도시(타올미나)에 먼저 다녀오겠습니다. 감사합니다。피안 지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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